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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184회 다시보기

방 송 제 목 : 역사저널 그날 184회

방 송 정 보 : KBS1 시사교양

방 송 시 간 : 일 오후 9시 30분에 방송

 

 

☞ 역사저널 그날 184회 다시보기 ☜

184회 수차례의 양위소동, 영조의 진심은?

▶ 조선의 장수 왕, 영조

양위(讓位)를 무려 8차례 이상 선언한 영조. 그러나 세자에게 양위가 이루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영조는 조선에서 제일 오래 집권한 왕으로 손꼽힌다. 재위기간 뿐만 아니라 조선왕 중에서 제일 장수한 왕이기도 하다. 내의원 진찰기록만 6000회가 넘고, 1년간 영조에게 올린 인삼만 해도 12kg가 넘는다는데... 규칙적인 식사와 소식(小食)을 생활화하며 건강을 유지한 영조, 그러나 그의 건강만큼 왕권이 탄탄하지만은 않았다.

▶ 영조, 왕권을 다지고 소통의 정치를 논하다

경종이 즉위한 지 4년 만에 급작스럽게 승하하고, 왕위에 오르게 된 영조. 집권초기 경종 독살설과 영조 어머니인 숙빈 최씨의 미천한 신분 등 왕권을 위협하는 소문은 끊이지 않고...영조 3년, 영조를 무함하는 내용의 괘서가 전국적으로 퍼지게 된다. 결국 몇 개월 뒤 소론 세력인 이인좌의 주도로 반란이 일어나고 영조는 왕위를 위협받는다. 그러나 다른 소론세력을 규합하여 소론의 반란을 진압한 영조. 그는 반란 진압 이후 자신의 지지세력인 노론과 경종의 지지세력이었던 소론을 적절히 등용하는 탕평책으로 왕권의 안정을 꾀한다.

영조가 다시 하교하기를 “결포가 편하다고 생각하는 자는 북쪽에 서고, 불편하다고 생각하는 자는 남쪽에 서라”고 지시하자 대부분이 남쪽에 섰다 -승정원일기, 영조 26년 7월


탕평으로 왕권을 다진 영조, 그는 소통의 달인이었다? 영조는 궐문 앞에서 신료들과 백성들과 함께 조세정책을 논했다. 그는 이후에도 30회 가량 백성을 직접 만나 소통하는 행보를 보인다. 청계천 준설도 영조의 소통이 이루어낸 결과물이다? 영조 36년, 2개월간의 공사 끝에 정비된 청계천. 이것은 영조가 천 주변에 살고 있었던 백성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비가 오면 개천이 침수할 우려가 있다는 민원을 받아들여 이루어진진 것이다. 청계천 공사가 완료된 이후에는 수위를 재는 다리를 만들어서, 후대 왕들이 청계천을 보수할 수 있도록 기준을 만든 영조. 그는 긴 재위기간 동안 백성들과의 소통을 기반으로 한 애민정책을 펼친다.

▶ 영조의 아픈 손가락, 사도세자

백성들과 소통했으나 아들과는 소통하지 못했던 영조. 그는 1762년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라는 명을 내린다. 조선왕실 최대의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사도세자가 처음부터 영조의 미움을 산 것은 아니었다? 사실 영조는 사도세자가 태어났을 때 누구보다 기뻐했던 ‘아들바보’였다는데...아들이 2살 되던 해에 세자로 책봉할 정도로 아들을 아꼈던 영조. 그가 자신의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여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오랜 기간 재위하며 백성들과 소통을 꾀한 영조의 삶은 8월 5일 일요일 밤 9시 40분 KBS 1TV <역사저널 그날> ‘수차례의 양위소동, 영조의 진심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역사저널 그날 진행자 & 출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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